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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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8세는 1491년 잉글랜드의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태어난 잉글랜드 왕으로, 1509년부터 1547년 사망할 때까지 재위했다. 그는 여섯 번의 결혼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 했으며,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로 잉글랜드 종교 개혁을 단행하여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시키고 스스로 수장이 되었다. 헨리 8세는 강력한 왕권으로 잉글랜드를 통치하며 웨일스를 병합하고 아일랜드 국왕을 자처했으며,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벌였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으며, 잉글랜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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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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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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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헨리 8세 |
로마자 표기 | Henry VIII |
재위 | 1509년 4월 22일 – 1547년 1월 28일 |
즉위 | 1509년 6월 24일 |
전임자 | 헨리 7세 |
후임자 | 에드워드 6세 |
출생일 | 1491년 6월 28일 |
출생지 | 플라센티아 궁전, 그리니치, 잉글랜드 |
사망일 | 1547년 1월 28일 (향년 55세) |
사망지 | 화이트홀 궁전, 웨스트민스터, 잉글랜드 |
매장일 | 1547년 2월 16일 |
매장지 | 세인트 조지 예배당, 윈저 성, 버크셔 |
왕가 | 튜더 가문 |
아버지 | 헨리 7세 |
어머니 | 엘리자베스 오브 요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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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
잉글랜드 국왕 | 잉글랜드 국왕 |
아일랜드 영주 | 아일랜드 영주 |
아일랜드 국왕 | 아일랜드 국왕 |
웨일스 공 | 웨일스 공 |
콘월 공작 | 콘월 공작 |
요크 공작 | 요크 공작 |
원수백 | 잉글랜드 원수백 |
오항 총독경 | 오항총독경 |
종교 | |
종교 | 가톨릭 (1491–1534) 잉글랜드 국교회 (1534–1547) |
배우자 | |
배우자 | 캐서린 오브 아라곤 (1509년 6월 11일 결혼, 1533년 5월 23일 혼인 무효) 앤 불린 (1533년 1월 25일 결혼, 1536년 5월 17일 혼인 무효) 제인 시모어 (1536년 5월 30일 결혼, 1537년 10월 24일 사망) 앤 오브 클레브스 (1540년 1월 6일 결혼, 1540년 7월 9일 혼인 무효) 캐서린 하워드 (1540년 7월 28일 결혼, 1542년 2월 13일 사망) 캐서린 파 (1543년 7월 12일 결혼) |
자녀 | |
자녀 | 헨리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에드워드 6세 헨리 피츠로이 (사생아)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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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491년 6월 28일 그리니치의 플라센티아 궁전에서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4]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1502년 형 아서가 사망하면서 10세의 나이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8] 그는 콘월 공작, 웨일스 공 등의 작위를 받았으나, 아버지 헨리 7세는 그에게 실질적인 통치 경험을 쌓게 하지는 않았다.[6] 헨리는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다양한 언어와 학문에 능통한 교육을 받았다.
1509년 아버지 헨리 7세가 사망하자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스페인과의 동맹 유지를 위해 형 아서의 미망인이었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했다.[10][13] 초기 통치에서는 아버지 시대의 불만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리처드 엠슨과 에드먼드 더들리 같은 인물들을 처형하기도 했다.[4]
헨리 8세는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다. 1511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주도한 반(反)프랑스 신성 동맹에 가담하여[21] 프랑스와의 전쟁에 나섰다. 1513년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침공하여 박차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테루안, 투르네 등의 도시를 점령했다. 같은 해,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가 프랑스와의 동맹에 따라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나, 캐서린 왕비가 지휘한 잉글랜드군은 플로든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고 제임스 4세를 전사시켰다.[23] 그러나 전쟁 비용 부담으로 1514년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후 유럽의 정세는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 로마 황제가 된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헨리 8세는 양측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펼치려 시도했다. 1520년에는 프랑수아 1세와 금단의 천의 들판에서 만나 화려한 외교 행사를 열었으나[24], 실질적인 동맹 강화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결국 헨리 8세는 카를 5세와 손잡고 다시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1525년 모어 조약으로 전쟁에서 발을 뺐다.
헨리 8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잉글랜드 종교 개혁이다. 왕비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를 교황청에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를 거부하자, 헨리 8세는 수장령을 통해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시키고 자신이 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총 여섯 번 결혼했으며, 두 명의 왕비를 처형했다. 그의 복잡한 결혼 생활과 종교 개혁은 잉글랜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는 젊은 시절의 부상 후유증과 비만, 통풍 등으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216][217][218][50][51][52]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와의 "거친 구애" 전쟁, 프랑스와의 마지막 전쟁 등을 이어갔다. 1547년 1월 28일 화이트홀궁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224] 유언에 따라 윈저성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 곁에 묻혔다.[225][58]
2. 1. 출생과 성장

헨리 8세는 1491년 6월 28일 켄트주 그리니치의 플라센시아 궁전에서 아버지 헨리 7세와 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자녀이자 둘째 아들이었다.[86][4] 당시 유럽은 영아사망률이 매우 높아, 헨리 8세의 여러 형제자매 중 형 아서 튜더, 누나 마거릿 튜더, 여동생 메리 튜더만이 유아기를 넘기고 살아남았다.[87][5] 그는 궁전 근처 관찰 프란체스코 수도회 교회에서 엑서터 주교 리처드 폭스에게 세례를 받았다.[88][6]
두 살 때인 1493년, 헨리는 도버 성의 수장(Constable of Dover Castle)과 5개 항구의 수장(Lord Warden of the Cinque Ports)으로 임명되었다.[6] 이듬해인 1494년에는 요크 공작 작위를 받았고, 이후 잉글랜드 원수(Earl Marshal)와 아일랜드 총독(Lord Lieutenant of Ireland) 등 군사와 관련된 여러 명예직에 임명되었다.[6] 1495년 5월에는 가터 훈장을 받았다.[89][6] 이러한 어린 나이의 작위 수여는 아버지 헨리 7세가 주요 직위들을 직접 통제하려는 의도와 함께, 왕족에게 연금을 지급하여 독립적인 자금을 마련해주려는 목적도 있었다.[89][6]
차남이었기에 왕위를 이을 것으로 예상되지 않아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90][6] 그러나 그는 최고의 가정교사들로부터 일류 교육을 받았으며, 라틴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고 이탈리아어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91][92]
1501년 11월, 헨리는 형 아서 튜더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결혼식에 요크 공작으로서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며 참석했다.[93] 캐서린은 당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연합으로 강대국으로 부상하던 스페인의 이사벨 1세와 페란도 2세의 막내딸이었다. 헨리 7세는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동맹 강화를 위해 이 결혼을 추진했다.[93]
그러나 1502년, 형 아서는 캐서린과 결혼한 지 불과 20주 만에 15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94][8] 장자의 죽음은 헨리 7세에게 큰 충격이었고, 차남 헨리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그를 공식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다.[95] 아서가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1504년 2월이 되어서야 헨리는 콘월 공작, 웨일스 공, 체스터 백작의 지위를 포함한 모든 권리를 계승받아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95] 하지만 그때까지도 왕위 계승을 위한 특별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하여,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국왕의 기술에 대해 훈련받지 않은 채" 왕위에 오른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96]
아서의 죽음은 잉글랜드와 스페인 간의 외교 관계에도 위기를 가져왔다. 헨리 7세는 스페인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왕위 계승자가 된 헨리 8세를 미망인이 된 캐서린과 결혼시키려 했다.[97][8] 스페인의 이사벨 1세 역시 이 계획에 동의하여[98] 1503년 6월 23일, 헨리 8세(당시 12세)와 캐서린(당시 17세)은 약혼 조약을 맺고 이틀 후 약혼했다.[99][10] 형과의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다면 '공공 정직성의 방해'에 대한 교황 특별 허가만 필요했지만, 헨리 7세와 스페인 대사는 성사 가능성까지 고려하여 '친족' 관계에 대한 특별 허가를 대신 얻으려 했다.[10] 1504년 이사벨 1세가 사망하고 카스티야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지면서 상황은 복잡해졌고, 헨리 7세와 페란도 2세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결국 헨리 왕자는 14세가 되었을 때(1505년) 이 결혼을 거부했다. 페란도 2세는 딸 캐서린을 스페인 대사로 임명하여 잉글랜드에 계속 머물게 했다.[11]
1506년 2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는 장차 잉글랜드 국왕이 될 헨리 8세에게 황금양모 기사단 작위를 수여하며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희망했다.[102][7]
2. 2. 즉위 초기
1509년 4월 21일 아버지 헨리 7세가 사망하자 17세의 헨리 8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12] 5월 10일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직후, 헨리 8세는 이전의 태도를 바꾸어 형 아서 튜더의 미망인이었던 캐서린과 결혼하겠다고 갑자기 선언하였다.[10][13] 왕세자 시절에는 형수와의 결혼이 부당하다며 교황청에 탄원까지 했던 헨리 8세였지만[103], 이제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기 위해 결혼한다고 주장했다.[11][104] 이는 자신의 입장 변화를 설명하기 좋은 명분이 되었다. 두 사람은 1509년 6월 11일 그리니치의 수도원에서 조용히 결혼식을 올렸다.[105][13]1509년 6월 23일, 헨리 8세는 캐서린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가졌다.[106][15] 캐서린은 스페인의 아버지 페란도 2세에게 보내는 편지에 "연일 이어지는 축제 속에 지내고 있다"고 적었다.[107][13]
대관식 직후, 헨리 8세는 아버지 시절의 가장 평판이 나빴던 두 장관, 리처드 엠슨과 에드먼드 더들리를 체포했다.[4] 이들은 헨리 7세 시기 국왕이 귀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했던 형벌 채권 발행을 담당했는데, 이로 인해 귀족들의 큰 반발을 사고 있었다.[109] 헨리 8세는 이들을 반역죄로 기소하여 1510년에 처형했는데,[4] 이는 아버지의 통치 방식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 귀족들을 달래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린 조치였다.[109] 또한 이는 훗날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신료들을 반역으로 몰아 숙청하는 헨리 8세의 통치 방식의 시작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108][4]
한편, 장미 전쟁 이후 몰락했지만 여전히 잠재적 왕위 경쟁자였던 요크가 인물들에 대해서는 아버지보다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토머스 그레이를 비롯하여 투옥되어 있던 요크가 인사 다수를 석방하고 사면했다.[110] 하지만 이러한 관용은 자신에게 충성을 보이는 인물에 한정되었고, 끝까지 화해하지 않았던 에드먼드 드 라 폴은 결국 1513년에 참수되었다.[111]
캐서린 왕비는 결혼 직후 임신했으나 1510년 1월 31일 딸을 사산했다.[112][16] 약 4개월 후 다시 임신하여[112][16] 1511년 1월 1일, 새해 첫날 아들 헨리를 낳았다.[113] 헨리 8세는 크게 기뻐하며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따 헨리라는 이름을 주고 콘월 공작 작위를 내렸으며, 성대한 축제를 열었다.[113] 그러나 왕자는 태어난 지 7주 만인 2월 22일에 사망했다.[113][16] 이후 캐서린은 1513년과 1515년에도 아들을 사산했고,[114] 1516년 2월에야 딸 메리를 낳았다.[114][17] 연이은 사산으로 긴장되었던 부부 관계는 메리의 출생으로 다소 완화되었다.[114][17]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 생활은 비교적 원만했다고 알려져 있지만,[115] 헨리 8세는 정부를 두었다.[115] 1510년경에는 버킹엄 공작의 자매 중 한 명인 앤 해스팅스와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이 돌았다.[116] 가장 확실하게 알려진 정부는 엘리자베스 블라운트로,[117][17] 1516년부터 약 3년간 헨리 8세의 총애를 받았다.[17] 당시 유럽 귀족 남성들이 정부를 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헨리 8세의 정부 수는 오히려 적은 편이라는 평가도 있다.[118][119] 그가 정확히 몇 명의 정부를 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120][121] 캐서린 왕비는 남편의 외도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1518년에 또다시 딸을 사산했다.[122][17]
1519년 6월, 엘리자베스 블라운트는 헨리 8세의 사생아인 헨리 피츠로이를 낳았다.[123][17] 헨리 8세는 1525년 헨리 피츠로이를 자신의 아들로 공식 인정하고 리치몬드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124]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적법한 아들을 얻지 못하자, 헨리 8세는 사생아인 피츠로이에게 왕위 계승권을 부여하는 방안까지 고려했으나,[125] 피츠로이가 1536년 7월에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126]
2. 3. 여섯 아내들과의 관계
헨리 8세는 후계자가 될 아들을 얻기 위한 절박함, 개인적인 욕망, 그리고 복잡한 정치적 계산 속에서 총 여섯 번의 결혼을 했다. 그의 결혼 생활은 잉글랜드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적 격변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개인적으로도 극적인 사건들로 점철되었다.헨리 8세는 본래 왕위 계승 서열 2위였으나 형 아서 튜더가 요절하면서 왕세자가 되었다. 그의 첫 아내 아라곤의 캐서린은 원래 형 아서와 결혼했었으나, 아서 사후 스페인과의 동맹 유지를 위해 헨리 8세와 재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딸 메리가 태어났지만, 헨리 8세는 왕위를 이을 아들을 간절히 원했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여왕 즉위 전례가 거의 없었고, 프랑스 왕위 계승권 주장에도 아들 후계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캐서린이 더 이상 출산할 수 없게 되자, 헨리 8세는 그녀와의 결혼이 형수와의 결혼이었으므로 교회법상 무효라고 주장하며 교황청에 혼인 무효화를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를 승인하지 않자, 헨리 8세는 수장령을 통해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자신이 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시작이었다.[30][31][32]
캐서린과 이혼한 헨리 8세는 이후 다섯 명의 아내를 더 맞이했다.
1. 아라곤의 캐서린 (Catherine of Aragon, 1485년–1536년): 1509년 결혼, 1533년 혼인 무효 선언. 메리 1세의 어머니.
2. 앤 불린 (Anne Boleyn, 1501/1507년경–1536년): 1533년 결혼, 1536년 처형. 엘리자베스 1세의 어머니. 간통과 반역 혐의로 참수되었다.
3. 제인 시모어 (Jane Seymour, 1508년경–1537년): 1536년 결혼, 1537년 사망. 에드워드 6세의 어머니. 에드워드 출산 후 산욕열로 사망했다. 헨리 8세가 유일하게 합법적인 아들을 낳아준 왕비로 여겨 사후 자신의 옆에 묻히도록 유언했다.
4. 클레페의 아나 (Anne of Cleves, 1515년–1557년): 1540년 결혼, 같은 해 혼인 무효 선언. 독일 공국의 공녀로 정치적 이유로 결혼했으나, 헨리 8세가 외모에 실망하여 6개월 만에 결혼이 무효화되었다. 이후 "국왕의 총애하는 누이" 칭호를 받고 영국에서 평온한 삶을 살았다.
5. 캐서린 하워드 (Catherine Howard, 1521년경–1542년): 1540년 결혼, 1542년 처형. 앤 불린의 사촌. 간통 혐의로 참수되었다.
6. 캐서린 파 (Catherine Parr, 1512년–1548년): 1543년 결혼, 1547년 헨리 8세 사망.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 두 번의 결혼 경험이 있는 부유한 과부였으며, 헨리 8세의 말년을 함께했다. 헨리 8세와 그의 두 딸 메리, 엘리자베스 사이의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헨리 8세 사후 토머스 시모어와 재혼했다.



헨리 8세의 복잡한 결혼 생활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왕위 계승 안정화라는 정치적 목표와 종교 개혁이라는 거대한 사회 변혁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그의 여섯 아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헨리 8세의 통치와 튜더 왕조의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역사가 데이비드 스타키는 헨리 8세가 아내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보통 매우 좋은 남편이었다... 여성을 좋아했고, 매우 다정했으며 관대했다. 아내들은 막대한 토지와 보석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사랑에 빠지지 않게 되면... 그는 그들을 그냥 잘라 버렸다. 그는 그냥 물러났고, 그들을 버렸다."라고 묘사했다.[3]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아라곤의 캐서린 (1509년 6월 11일 결혼; 1533년 5월 23일 혼인 무효) | |||
이름 없는 딸 | 1510년 1월 31일 | 사산 | |
콘월 공작 헨리 | 1511년 1월 1일 | 1511년 2월 22일 | 생후 약 2개월 만에 사망 |
이름 없는 아들 | 1513년 9월 17일 | 출생 직후 사망 | |
이름 없는 아들 | 1514년 11월[59] | 출생 직후 사망 | |
메리 1세 여왕 | 1516년 2월 18일 | 1558년 11월 17일 | 1554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 자녀 없음 |
이름 없는 딸 | 1518년 11월 10일 | 임신 8개월 만에 사산 또는 최소 1주일 생존 | |
엘리자베스 블런트 (정부; 헨리 8세가 인정한 유일한 사생아 출산) | |||
헨리 피츠로이 | 1519년 6월 15일 | 1536년 7월 23일 | 사생아; 1525년 헨리 8세가 리치먼드 및 서머싯 공작으로 인정; 자녀 없음 |
앤 불린 (1533년 1월 25일 결혼; 1536년 5월 17일 혼인 무효) 1536년 5월 19일 참수 | |||
엘리자베스 1세 여왕 |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 | 미혼; 자녀 없음 |
이름 없는 아이 | 1534년 여름 | 유산 또는 가임신 추정 | |
이름 없는 아이 | 1535년 | 유산 가능성 있음 | |
이름 없는 아들 | 1536년 1월 29일 | 유산, 남아로 추정됨 (임신 4개월 차) | |
제인 시모어 (1536년 5월 30일 결혼) 1537년 10월 24일 사망 | |||
에드워드 6세 왕 | 1537년 10월 12일 | 1553년 7월 6일 | 15세에 미혼으로 사망; 자녀 없음 |
클레페의 아나 (1540년 1월 6일 결혼) 1540년 7월 9일 혼인 무효 | |||
자녀 없음 | |||
캐서린 하워드 (1540년 7월 28일 결혼; 1541년 11월 23일 혼인 무효) 1542년 2월 13일 참수 | |||
자녀 없음 | |||
캐서린 파 (1543년 7월 12일 결혼) 헨리 8세는 1547년 1월 28일 사망 | |||
자녀 없음 |
2. 3. 1. 아라곤의 캐서린

헨리 8세의 첫 아내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는 본래 그의 형인 아서 튜더와 약혼했으나, 아서가 요절하면서 스페인과의 동맹 유지를 원했던 아버지 헨리 7세의 뜻에 따라 헨리 8세와 결혼하게 되었다. 왕세자 시절 헨리 8세는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에 대해 교황청에 탄원까지 하며 반대했지만,[103] 1509년 4월 21일 왕위를 계승한 후에는 입장을 바꾸어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선언했다. 이는 아버지의 유언을 따른다는 명분이었으나,[104] 훗날 이 결혼을 무효화하려 할 때 다시 문제가 되었다. 헨리 8세와 카탈리나는 1509년 6월 11일 그리니치의 수도원에서 결혼식을 올렸고,[105] 6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치렀다.[106] 당시 헨리 8세는 17세, 카탈리나는 24세였다.
결혼 초기 부부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탈리나는 결혼 직후 임신했으나 1510년 1월 딸을 사산했고, 1511년 1월에는 아들 헨리를 낳았지만 생후 두 달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113] 이후에도 몇 차례의 유산을 겪은 뒤, 1516년 2월 딸 메리(훗날 메리 1세)를 낳았다. 메리의 출생으로 잠시 부부 관계가 개선되기도 했으나,[114] 헨리 8세는 후계자가 될 아들을 간절히 원했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여왕이 통치한 전례가 거의 없었고, 여왕이 즉위하면 튜더 왕가의 명맥이 끊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또한 프랑스 왕위 계승권까지 주장하던 헨리 8세에게는 살리카법을 내세우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아들이 필요했다.
결혼 생활 동안 헨리 8세는 정부를 두었는데, 대표적으로 엘리자베스 블라운트가 있으며 그녀는 1519년 헨리 8세의 사생아인 헨리 피츠로이를 낳았다.[123] 헨리 8세는 1525년 피츠로이를 자신의 아들로 공인하고 리치몬드 공작 작위를 수여하며[124] 후계자로 삼는 방안까지 고려했으나,[125] 피츠로이는 1536년 자녀 없이 요절했다.[126] 또한 카탈리나의 시녀였던 메리 불린 역시 헨리 8세의 정부였으며, 그녀의 두 자녀가 헨리 8세의 사생아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헨리 8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127]
1525년경, 40세가 된 카탈리나가 폐경을 맞아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자[128] 아들을 원했던 헨리 8세는 결혼 무효화를 결심하게 된다.[129][130] 당시 그는 카탈리나의 시녀이자 메리 불린의 동생인 젊고 매력적인 앤 불린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었다.[154] 앤 불린은 헨리 8세의 정부가 되기를 거부했고, 이는 헨리 8세가 결혼을 무효화하고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려는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160] 헨리 8세는 후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생아 헨리 피츠로이를 적자로 인정하는 방안, 딸 메리를 빨리 결혼시켜 손자를 얻는 방안 등을 고려했으나, 결국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앤 불린과 재혼하는 길을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선택했다.[131][114]
헨리 8세는 자신이 형의 아내와 결혼한 것이 레위기 20장 21절("제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추한 짓이다. ... 그가 후손을 보지 못하리라")을 어긴 것이므로, 카탈리나와의 결혼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결혼 무효화를 요청했다.[135][30][31]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과거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 칭호까지 받았던[132][29] 헨리 8세는 처음에는 교황청과의 갈등을 예상하지 못했다.[133] 그러나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탈리나의 조카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에 의해 로마가 점령당하는 등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138] 카를 5세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헨리 8세의 결혼 무효 요청을 쉽게 승인할 수 없었다.[137][32]
교황은 1528년 특사 로렌초 캄페지오를 런던에 파견하여 결혼 무효 문제를 심리하게 했지만, 결국 허가하지 않았다.[139][32] 1529년 로마에서 열린 재심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140][32] 이에 분노한 헨리 8세는 협상을 주도했던 최측근 추기경이자 총리 토머스 울지에게 책임을 물어 실각시켰다.[141][142] 울지는 반역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기다리던 중 사망했다.[143][144][32] 이후 헨리 8세는 토머스 모어를 새로운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모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초기에는 국왕의 결혼 무효 문제에 협력하는 듯 보였다.[146][123]


교황청과의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헨리 8세는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1532년, 헨리 8세는 자신의 결혼 무효 주장을 지지해 온 토머스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34] 그리고 1533년 1월, 이미 임신 중이던 앤 불린과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고, 5월에는 크랜머 대주교가 주재한 특별 법정에서 캐서린과의 결혼이 공식적으로 무효임을 선언하게 했다.[147][124] 이로써 24년간 지속된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 생활은 파탄났고,[3] 캐서린은 왕비 칭호를 박탈당하고 '아서의 미망인'인 왕대비(Dowager Princess of Waleseng)로 강등되어 궁정에서 쫓겨났다. 그들의 딸 메리는 사생아로 선언되어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다.[69] 이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헨리 8세와 크랜머 대주교를 파문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가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잉글랜드 국교회를 설립하는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2. 3. 2. 앤 불린
캐서린 왕비의 시녀였던 앤 불린은 언니 메리 불린과 달리 헨리 8세의 정부가 되기를 거절했다.[160]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느끼던 차에 앤 불린에게 매료되었고, 왕조의 후계자를 얻기 위해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앤과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154][114]
1532년 겨울, 헨리 8세는 칼레에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를 만나 자신의 재혼 계획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148] 프랑스의 협조를 어느 정도 확인한 헨리 8세는 도버로 돌아와 앤 불린과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고[149], 곧이어 앤은 임신했다. 아들의 출생 가능성이 높아지자 헨리 8세는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를 공식화하고자 했다.[150] 1533년 1월 25일, 런던에서 앤 불린과 공식적인 결혼식을 올렸으며[151],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는 5월 23일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5월 28일에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이 유효하다고 선언했다. 6월 1일 앤 불린은 새로운 왕비로 선포되었다.[152]
1533년 9월 7일, 앤 불린은 딸을 출산했다. 헨리 8세는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지만, 아직 젊은 앤이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 기대했다. 딸의 이름은 헨리 8세의 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따 엘리자베스라고 지었다.[153] 헨리 8세는 왕위계승법을 개정하여 캐서린과의 결혼이 무효임을 명시하고, 딸 메리를 사생아로 격하시켜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다. 대신 "합법적 결혼"으로 왕비가 된 앤 불린이 낳을 아들에게 최우선 계승권을 부여하고, 아들이 없을 경우 엘리자베스가 계승권을 갖도록 정했다.[154]
헨리 8세의 갑작스러운 수장령 선포와 캐서린과의 이혼은 많은 반발을 샀으나, 헨리 8세는 토머스 모어, 존 피셔 주교 등 반대하는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을 처형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155]
결혼 후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앤은 헨리 8세가 다른 정부를 두는 것에 분노했고, 이는 공식 석상에서도 종종 표출되어 많은 적을 만들었다. 헨리 8세는 점차 앤에게 염증을 느꼈다.[156] 1534년 앤의 임신이 상상임신 혹은 유산으로 끝나자, 그해 말 헨리 8세는 캔터베리 대주교 크랜머와 총리 토머스 크롬웰을 불러 앤과의 파혼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157]
1536년 1월 8일, 캐서린이 병으로 사망했다. 헨리 8세는 캐서린의 죽음을 기뻐하며 다음날 노란색 옷을 입고 축제처럼 행동했다.[158][39] 앤 불린은 다시 임신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면 자신의 처지가 위태로워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달 말, 헨리 8세가 마상 시합 중 낙마하여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들은 앤은 충격으로 유산했는데, 태아는 남자였다.[159] 이 사건은 앤 불린 몰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60]
불린 가문은 추밀원에서 주요 직책을 맡고 있었으나,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을 비롯한 많은 정적들이 있었다. 당시 추밀원은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중 어느 세력과 동맹을 맺을지를 두고 나뉘어 있었는데, 불린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동맹을 선호했지만 헨리 8세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추진하면서 입지가 약화되었다.[166] 또한, 성인이 된 메리 공주와 헨리 8세의 화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는데, 여기에는 캐서린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불린 가문에 적대적인 세력, 특히 총리 토머스 크롬웰도 포함되어 있었다.[167][168][40]
앤 불린의 몰락은 급작스럽게 진행되었다. 헨리 8세는 새로운 정부인 제인 시모어를 궁정 안으로 들여 앤을 대체할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고[169], 앤의 남동생 조지 불린에게 수여될 예정이던 가터 훈장을 니콜라스 카루에게 대신 수여했다.[170] 1536년 4월 30일부터 5월 2일 사이에 조지 불린을 포함한 다섯 명의 남성이 앤 불린과의 간통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들은 증거가 불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죄 판결을 받고 5월 17일 처형되었다.[171] 같은 날, 캔터베리 대주교 크랜머는 램버스 궁전에서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포했다. 크랜머는 헨리 8세가 앤의 언니 메리 불린과 과거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교회법상 앤과의 결혼 역시 금지된 친족 관계에 해당하여 무효라는 논리를 편 것으로 보인다. 앤 불린에게는 반역적인 근친상간 혐의 외에도 국왕 시해 음모, 주술 사용과 같은 마녀 혐의까지 덧씌워졌다는 견해도 있으나, 정확한 실체는 불분명하다.[172] 결국 앤 불린은 1536년 5월 19일 아침, 런던탑에서 참수형을 당했다.[173][60]
2. 3. 3. 제인 시모어
앤 불린이 처형된 다음 날인 1536년 5월 20일, 45세의 헨리 8세는 앤 불린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와 약혼했다. 열흘 뒤인 5월 30일, 두 사람은 런던 화이트홀 궁전의 왕비 침실에서 윈체스터 주교 스티븐 가디너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1536년, 헨리는 제2계승법(1536년 왕위 계승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제인 시모어가 낳을 자녀를 왕위 계승 서열의 다음 순위로 지정하고, 메리 공주와 엘리자베스 공주를 사생아로 선언하여 왕위 계승에서 제외했다. 또한, 헨리에게 더 이상 자녀가 없을 경우 유언을 통해 왕위 계승자를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1537년 10월 12일, 제인 시모어는 마침내 헨리 8세가 그토록 원하던 아들, 훗날 에드워드 6세가 되는 에드워드 왕자를 낳았다. 그러나 출산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제인 왕비는 출산 후 산욕열로 추정되는 감염 증세를 보이다가 1537년 10월 24일 사망했다. 그녀는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묻혔다. 헨리 8세는 아들을 얻은 기쁨과 동시에 왕비를 잃은 슬픔을 겪었지만, 충격에서 비교적 빨리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곧 토머스 크롬웰 등 측근들에게 새로운 왕비를 물색하도록 지시했으며, 주로 유럽 대륙의 왕족이나 귀족 가문 여성을 대상으로 검토가 이루어졌다.
2. 3. 4. 클레페의 아나

잉글랜드의 해안선 방어 문제에 직면하자, 총리 토머스 크롬웰은 외교적 해결책으로 헨리 8세와 독일 클레페 공작가의 결혼 동맹을 제안했다. 당시 클레페 공작 빌헬름은 루터교회 신자였고, 그의 영지는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합스부르크가나 프랑스 같은 가톨릭 세력의 공격에 대비한 동맹이 될 수 있었다.[182] 크롬웰은 빌헬름 공작의 스물다섯 살 여동생 클레페 공녀 아나를 유력한 후보로 생각했다. 이 외에도 로렌가의 아나, 덴마크 왕녀 크리스티나, 귀즈의 루이즈 등 다른 개신교 귀족 여성들도 신붓감 물망에 올랐다.
잉글랜드는 궁정 화가 한스 홀바인을 클레페로 보내 아나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183] 초상화를 본 헨리 8세는 흡족해하며 결혼을 승낙했다. 당시 헨리 8세는 마흔아홉 살로, 스물네 살 연하인 아나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184] 그러나 아나가 북해를 건너 잉글랜드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그녀의 실물을 본 헨리 8세는 외모에 크게 실망했다. 그는 "그림과 실제 인물이 이렇게 다른 경우는 처음 본다"며 결혼을 취소하려 했으나[185], 이미 때는 늦어 1540년 1월 결혼식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 바로 다음 날, 헨리 8세는 크롬웰에게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과 살 수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186] 이 사건은 결국 크롬웰의 정치적 몰락을 초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홀바인이 아나의 초상화를 실제보다 훨씬 아름답게 그렸다고 추측하지만, 당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초상화는 아나의 실제 모습과 상당히 유사했던 것으로 보인다.[187] 헨리 8세가 마음을 바꾼 진짜 이유는 정략결혼 상대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기보다 잉글랜드 내 귀족 여성을 새 왕비로 맞이하길 원했기 때문일 수 있다.
두 사람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 자체를 무효로 할 여지가 있었다. 헨리 8세는 최대한 빨리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했다.[188][189] 아나는 별다른 반대 없이 헨리 8세의 뜻을 따랐는데[190], 아마 그녀 역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헨리 8세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헨리 8세는 아나가 과거 프랑수아 1세 드 로렌과 약혼했던 사실을 결혼 무효의 근거로 내세웠다.[191] 결혼은 1540년 7월에 무효가 되었지만, 헨리 8세는 아나를 고향인 클레페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쫓겨난 신부라는 불명예는 동맹 관계를 악화시켜 클레페를 적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헨리 8세는 아나에게 "국왕의 누이"라는 칭호와 함께 장원과 연금을 하사했다.[192][44] 클레페 공녀 아나는 헨리 8세와 관련된 여성들 중 드물게 평온한 삶을 살다가 장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 8세의 마음은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노퍽 공작의 조카 캐서린 하워드에게 향했다. 노퍽 공작은 크롬웰의 정적이었기에, 이는 크롬웰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193] 결국 헨리 8세는 크롬웰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크롬웰의 측근이었던 급진 개신교 지지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처형하며 압박했지만[194], 노련한 정치인인 크롬웰 본인을 이단으로 모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혼 실패를 공식적인 처형 명분으로 삼을 수도 없었기에[195], 헨리 8세는 크롬웰이 총리 지위를 이용해 독직, 여권 무단 발급, 무역 수수료 횡령 등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씌워 1540년에 처형했다.[196]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크롬웰의 죽음이 실제로는 아나와의 정략결혼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 3. 5. 캐서린 하워드

토머스 크롬웰이 처형된 1540년 7월 28일, 헨리 8세는 클레페의 아나의 시녀였던 17세의[45] 캐서린 하워드와 다섯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197] 캐서린은 노퍽 공작의 조카였는데, 노퍽 공작은 크롬웰의 정적이었다.[45] 헨리 8세는 젊은 새 왕비를 매우 아꼈으며, 몰수한 토머스 크롬웰의 토지와 많은 보석을 그녀에게 선물했다.[198]
그러나 캐서린 하워드는 결혼 전부터 여러 남성과 관계를 맺어왔고, 결혼 후에도 왕실 신하인 토머스 컬페퍼와 불륜 관계를 이어갔다. 또한 결혼 전 비밀리에 약혼했던 사이였던 프란시스 더러햄을 자신의 비서로 고용하였다.[199] 이러한 소문은 궁정 내에 퍼져나갔고, 결국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에게까지 알려졌다. 크랜머는 조사를 진행한 후 그 결과를 헨리 8세에게 보고했다.[199]
사냥에서 돌아온 헨리 8세는 처음에는 크랜머의 보고를 믿지 않으려 했으나, 더러햄이 심문 과정에서 캐서린과의 과거 관계를 자백하자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200] 캐서린 하워드는 심문에서 더러햄과의 비밀 약혼은 인정했지만, 결혼 후의 관계는 더러햄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간통죄로 처형될 위기에 놓인 더러햄은 캐서린이 자신뿐만 아니라 컬페퍼와도 불륜 관계였다고 폭로했다.[201]
결국 캐서린 하워드, 토머스 컬페퍼, 프란시스 더러햄 세 사람 모두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컬페퍼와 더러햄은 먼저 처형되었고, 캐서린 하워드는 1542년 2월 13일 런던탑에서 참수되었다.[201]
캐서린 하워드의 결혼은 앤 불린의 전례에 따라 무효로 선언되었고, 헨리 8세는 다시 새로운 왕비를 찾게 되었다.
2. 3. 6. 캐서린 파
1543년 7월, 헨리 8세는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왕비로 캐서린 파를 맞이했다. 캐서린 파는 이미 두 번의 결혼에서 남편과 사별한 부유한 귀족 미망인이었다.[202] 그녀는 학식이 높고 개신교 신학을 신봉하는 개혁적인 인물이었다.
캐서린 파는 헨리 8세와 종교 문제에 대해 논쟁하기도 했지만, 당시 토머스 크롬웰 처형 이후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해지면서[203] 잉글랜드의 종교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웠다. 대신 그녀는 헨리 8세와 그의 두 딸, 메리와 엘리자베스 사이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캐서린 파는 이미 아들 에드워드가 후계자로 확실시된 상황에서 딸들을 계속 서자로 남겨두는 것이 왕실에 좋지 않다고 헨리 8세를 설득했다. 그 결과 헨리 8세는 자신의 이전 행동(카탈리나, 앤 불린과의 결혼 무효 선언 등)이 정당했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두 딸과 화해하였다.[204] 이는 1543년 왕위계승법 개정으로 이어져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의 뒤를 잇는 왕위 계승권을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캐서린 파는 에드워드 왕자뿐만 아니라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가 사망하자 캐서린 파는 다시 미망인이 되었다. 이후 그녀는 제인 시모어의 오빠인 토머스 시모어와 재혼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캐서린 파는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진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돌보았다. 그러나 남편 토머스 시모어가 엘리자베스에게 부적절하게 접근하는 것을 목격한 후, 엘리자베스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캐서린 파는 1548년 9월 5일, 딸 메리 시모어를 낳은 직후 산욕열로 사망했다.
2. 4. 말년

헨리 8세의 통치 말기는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이 더욱 심화되는 시기였다. 1538년, 잉글랜드는 캔터베리 대성당에 있던 토마스 베켓의 성소를 파괴하며 성인 숭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는 개신교적 신앙을 공식화했다. 이에 교황 바오로 3세는 헨리 8세를 다시 한번 파문했다.[206][47] 1540년, 헨리 8세는 모든 교회에서 성인을 기리는 성소의 파괴를 승인했으며, 1542년에는 남아있던 모든 수도원을 해산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여 왕실 재정에 편입시켰다. 이 조치로 인해 잉글랜드 의회 상원에서 수도원장들이 사라지고 주교들만 남게 되어, 성직 귀족의 수가 세속 귀족보다 처음으로 적어졌다.
대외적으로는 1539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사이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헨리 8세는 카를 5세와 비밀 동맹을 맺고 다시 한번 프랑스를 침공할 기회를 엿보았다.[207] 프랑스 침공에 앞서 배후의 위협인 스코틀랜드를 먼저 제압하고자 했다. 1542년 11월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군을 크게 격파했고,[208] 이 패배의 충격으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가 사망하면서 갓 태어난 메리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와 아기 여왕 메리를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으나, 스코틀랜드 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8년간 잉글랜드는 이 결혼을 강요하며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는, 이른바 "거친 구애"라 불리는 전쟁을 이어갔다.[209][210][211]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길어지는 와중에도 헨리 8세는 1544년 카를 5세와 함께 프랑스를 침공했다. 헨리 8세가 직접 원정을 지휘하여 불로뉴를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으나,[212][213]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재정이 고갈되어 더 이상의 진격은 불가능했다. 결국 카를 5세가 프랑스와 단독으로 화친을 맺자[214], 헨리 8세 역시 1546년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전쟁으로 잉글랜드는 65만파운드 이상의 비용을 소모하며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215]

말년에 헨리 8세는 심각한 건강 문제에 시달렸다. 허리둘레가 약 137.16cm에 달하는 고도비만으로 인해 보조기구 없이는 걷기 힘들었고, 온몸에 고름이 차는 종기가 생겼으며 통풍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것은 1536년 마상 창 시합에서 입은 다리 부상이 큰 원인이었다. 이 부상은 제대로 아물지 않고 계속 덧나 활동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이는 급격한 체중 증가와 함께 성격 변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216][217][218][50][51][52] 일부에서는 매독을 사인으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219][220][53] 대신 고도비만과 함께 채소 섭취 부족으로 인한 괴혈병[221][54]이나, 자녀들의 높은 유산율 등을 고려할 때 켈 양성 혈액형과 관련된 맥레오드 증후군의 가능성도 제기된다.[222][223][55][56]
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는 화이트홀궁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24]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윈저성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안치되어 세 번째 왕비였던 제인 시모어 옆에 묻혔다.[225][58] 왕위는 그의 유일한 적자인 에드워드 6세가 계승했다.
2. 4. 1. 사후
말년에 헨리 8세는 극심한 비만에 시달렸고, 과거 기병 창시합에서 입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점차 악화되었다. 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는 화이트홀 궁전에서 서거했으며, 그의 시신은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안치되었다.헨리 8세는 1544년 왕위계승법을 통해 자신의 사후 왕위 계승 순서를 정했다. 첫째로 아들 에드워드 6세와 그의 후손, 에드워드에게 후사가 없을 경우 첫째 딸 메리 1세와 그 후손, 메리에게도 후사가 없을 경우 둘째 딸 엘리자베스 1세와 그 후손 순서였다.[205] 만약 엘리자베스마저 후사가 없다면 튜더가 직계 혈통은 끊어지고 방계인 그레이 가문이 왕위를 잇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헨리 8세는 스코틀랜드로 시집간 누이 마거릿 튜더의 후손인 스튜어트 가문은 왕위 계승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했다.[226] 이는 스코틀랜드 왕가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헨리 8세가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당시 9세였던 아들 에드워드가 에드워드 6세로 왕위를 계승했다. 에드워드 6세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헨리 8세는 16명의 집행자를 지명하여 에드워드가 18세가 될 때까지 섭정 평의회를 운영하도록 했다. 집행자들은 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인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를 호국경으로 선출하여 왕국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드워드 6세는 1553년, 15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사망했다. 사망 전 에드워드 6세는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제인 그레이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이는 메리와 엘리자베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결국 헨리 8세의 유언대로 첫째 딸 메리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 1세 역시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는 둘째 딸 엘리자베스 1세에게 넘어갔다.
"처녀 여왕"으로 불린 엘리자베스 1세 역시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튜더 왕조의 직계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결국 헨리 8세가 그토록 배제하려 했던 누이 마거릿 튜더의 증손자이자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하여 스튜어트 왕조 시대를 열었다. 이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같은 군주를 모시는 동군연합, 즉 왕관 연합(王冠連合)의 시작이기도 했다.
3. 통치
헨리 8세는 르네상스적 인간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궁정은 화려함과 동시에 학문과 예술 혁신의 중심지였다. 그는 직접 작곡과 작사를 하는 시인이기도 했는데, 《좋은 동료들과 함께하는 시간》과 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전국에서 재능 있는 이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들고 당대 음악가들을 후원했으며,[227] 자신도 류트, 오르간, 버지널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할 줄 알았다.[228][61]
또한 매우 활동적인 성격으로 스포츠와 사냥, 주사위 놀이와 같은 도박을 즐겼다. 특히 마상 창시합을 좋아하여 직접 참가하기도 했고, 테니스 실력도 뛰어났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게 교육받은 최초의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라틴어를 읽고 썼으며,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이러한 인문주의적 소양을 바탕으로 개인 도서관을 만들고 책을 탐독하며 주석을 달았으며,[229] 이를 교황청과의 대립이나 왕권신수설을 옹호하는 등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논리를 세우는 데 활용했다.[230] 대중적으로는 연극과 공연을 통해 교황과 수도원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자신을 잉글랜드의 영웅적 수호자로 선전하며[231] 절대적인 권위의 이미지를 구축하려 애썼다.[232][63]
180cm 가량의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헨리 8세는 자신의 육체적 힘을 과시하는 활동적인 오락을 즐겼는데, 이는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고 위신을 높이려는 정치적 목적과도 연결되었다. 그는 격렬한 스포츠를 즐기고 화려한 의상을 입고 외국 사절들을 만나 자신의 위엄을 과시했다. 1517년 그리니치에서 열린 마상 창시합에서는 금박과 보석으로 장식된 갑옷을 입고 참가하여 외국 대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 대사는 "잉글랜드를 야만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여기 세계의 부와 문명이 한 자리에 모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233] 1536년 마상 창시합에서 큰 부상을 입은 후 직접 경기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대회를 개최하며 위세를 보였다. 그러나 부상 이후 활동량이 줄면서 급격히 체중이 늘었고, 말년에는 건강 문제로 고생했다.[234][235][236]
1509년 4월, 아버지 헨리 7세가 사망하자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12]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 직후, 교황의 특별 허가나 지참금 문제 등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의 미망인이었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10][13] 이는 아버지의 유언이었다고 주장했지만,[11]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자신의 손녀와의 결혼을 추진하던 것을 무산시키는 등 정치적인 계산도 깔려 있었다. 결혼식은 1509년 6월 11일 조용히 치러졌고,[13] 6월 2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한 대관식이 열렸다.[15]
즉위 직후 헨리 8세는 아버지 시대의 가장 평판이 나빴던 장관 리처드 엠프슨과 에드먼드 더들리를 체포하여 반역죄로 처형했다. 이는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그의 통치 방식의 시작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4] 한편, 왕위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요크 가문에 대해서는 아버지보다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에드먼드 드 라 폴(서퍽 공작)처럼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제거했다.
왕비 캐서린은 여러 차례 임신했지만, 1511년에 태어난 아들 헨리(콘월 공작)은 7주 만에 사망했고, 이후에도 사산을 반복하다 1516년에 딸 메리를 낳았다.[16][17] 안정적인 후계자를 얻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헨리 8세는 정부를 두었는데, 그중 엘리자베스 블런트는 1519년 아들 헨리 핏츠로이를 낳았다.[17] 헨리 8세는 이 서자를 1525년 리치먼드 공작으로 임명하며 각별히 대우했고, 한때 그를 합법적인 후계자로 만들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헨리 핏츠로이는 1536년 자식 없이 사망했다. 후계자 문제는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중요한 과제로 남았다.
3. 1. 정부 운영


헨리 8세 시기 잉글랜드의 공식적인 최고 행정 기구는 추밀원이었으나, 헨리 8세는 고위 귀족들과의 직간접적인 별도 연락망을 통치에 활용하기도 했다.[237] 그는 후원 제도를 이용해 추밀원 같은 공식 기구뿐 아니라 비공식 고문과 측근들로 이루어진 왕실 궁정을 운영했다.
헨리 8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고, 전통적으로 신료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잉글랜드 정치 환경 속에서도 이례적으로 전제 군주적인 통치를 펼쳤다. 그는 외교, 선전포고, 화폐 발행, 사면권 등 왕실 특권을 행사했으며,[62] 자신의 뜻에 거슬리는 인물은 총리나 최측근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숙청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실제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왕비 2명, 귀족 20명, 주요 공직자 4명, 측근과 친구 6명, 추기경 존 피셔를 포함한 수많은 인물들이 처형당했다.[238][63] 궁정 인물들의 흥망성쇠는 매우 극심했다. 물론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 과정에서 볼 수 있듯 의회와의 협력이나 법적, 재정적 제약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62]
1514년부터 1529년까지는 추기경이자 대법관이었던 토머스 울지가 총리로서 국내외 정책을 총괄했다.[241] 울지는 성실청과 별궁 재판소 등을 통해 중앙 정부 권력을 강화하려 했고,[241] 한때 독자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듯 보였으나 기본적으로는 국왕의 심중을 헤아려 움직였다.[242] 그는 헨리 8세가 정치에 덜 관여하는 동안 그 공백을 메웠지만,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 문제 처리 실패와 프랑스와의 동맹을 우선시한 헨리 8세의 외교 정책 변화 등으로 인해 결국 왕의 신임을 잃고 몰락했다.[244] 울지의 몰락 이후 헨리 8세는 반역죄 심문 및 처벌 권한까지 완전히 장악하며 왕권을 더욱 강화했다.[243][65]
울지의 뒤를 이어 토머스 크롬웰이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법률가 출신인 크롬웰은 행정 개혁을 추진하여 정부 기능을 왕실 중심에서 공적인 부서 중심으로 옮기려 노력했다.[67] 그는 수도원 해산을 주도하여 막대한 재산을 왕실로 귀속시켰고, 비효율적인 왕실 의회를 작고 효율적인 추밀원으로 개편했으며, 국가 재정 관리 시스템을 정비하고자 했다. 역사가 G. R. 엘턴은 크롬웰이 독자적으로 "정부의 튜더 혁명"을 이끌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239] 앤 불린의 몰락 이후에는 그 역시 헨리 8세의 의중을 거스르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240] 크롬웰은 클레베의 앤과의 결혼 주선 실패의 책임을 지고, 정적인 노퍽 공작 등 궁정 내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결국 1540년 반역죄 등으로 처형되었다.[46][245]
울지나 크롬웰 같은 총리들이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는지, 아니면 헨리 8세의 의지를 충실히 따랐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80] G. R. 엘턴 같은 학자는 크롬웰이 헨리 8세와는 별개로 정부 개혁을 주도했다고 보지만,[239] 다른 한편에서는 앤 불린 처형 이후 강화된 왕의 권력 아래에서 총리들의 자율성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라고 본다.[240]
헨리 8세는 검소했던 아버지 헨리 7세로부터 125만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과 번영하는 경제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화려한 궁정 생활 유지, 빈번한 전쟁, 왕궁 건축 등으로 인해 재산을 탕진했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실 재정은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수도원 해산을 통해 연간 12만파운드 상당의 수도원 토지를 확보하여 일시적으로 국고를 채웠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특히 말년에는 재정난 타개를 위해 화폐의 질을 떨어뜨리는 평가절하를 단행했는데, 이는 단기적으로 수입 증대 효과를 가져왔지만 장기적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여 국가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3. 2. 의회와의 관계

잉글랜드 의회는 13세기 이래 국왕과 여러 차례 갈등을 겪으며 독자적인 입법권을 확보해왔다.[246] 헨리 8세 시대에도 국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수 없었으며, 전쟁 비용과 같은 막대한 예산 사용에도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247] 튜더가는 장미 전쟁 이후 혼란을 수습하며 상하 양원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전통적인 귀족 기반은 비교적 약했다.[249]
헨리 8세는 프랑스 정복과 같은 야심 찬 계획을 위해 자주 전쟁을 일으켰고, 이는 막대한 재정 부담으로 이어졌다. 그는 수도원 해산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에 자주 협조를 요청해야 했다. 그러나 재정 상태가 악화되자 의회는 헨리 8세의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프랑수아 1세를 상대로 한 2차 프랑스 침공 당시, 의회의 반대로 전쟁을 중단하고 철수해야 했다.[249]
의회는 주로 세금 문제에 대해 국왕을 견제할 수 있었지만[247], 반란 진압, 외교, 왕위 계승 등 다른 많은 분야에서는 국왕의 권한이 강했다. 헨리 8세는 수장령을 통해 잉글랜드 교회를 교황청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수도원 재산을 왕실로 귀속시켜 재정 기반을 강화했다. 이러한 종교 개혁 관련 입법은 주로 총리이자 상원의 당연직 의장이었던 토머스 크롬웰이 의회를 통해 주도했다.[249] 크롬웰은 효율적인 관리 능력을 바탕으로 의회를 통해 개혁을 추진했지만[67], 그의 몰락 이후 헨리 8세 말년의 교회 정책은 혼란을 겪게 된다.[109]
헨리 8세는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지만[230], 재정 문제 등 현실적인 제약으로 의회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기에[62] 의회와의 관계는 협력과 긴장이 공존하는 양상이었다.
3. 3. 군사
헨리 8세 시기 잉글랜드 왕국의 주요 군사적 목표는 프랑스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었다. 잉글랜드는 북부 국경의 전략적 요충지인 베릭어폰트위드와 칼라일, 그리고 당시 잉글랜드 영토였던 프랑스의 칼레에 상비군을 주둔시켰다. 이들을 제외하면 16세기 잉글랜드 내 상비군 규모는 수백 명에 불과하였다.[252]1513년 프랑스 침공 당시 동원된 잉글랜드 군대는 약 3만 명 규모였으며, 주요 무장은 빌과 장궁이었다. 당시 유럽 대륙에서는 초기 화승총인 아쿼버스와 이를 보호하기 위한 파이크를 사용하는 군대로 전환하고 있었으나, 이 시기 잉글랜드 군대와의 전력 차이는 아직 크지 않았다.[253] 헨리 8세는 화약 무기의 발달에 대응하여 군대에 새로운 갑옷을 보급하고, 공성전을 위한 대포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254]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으로 교황청과 단절하면서 예상되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255], 헨리 8세는 1538년부터 켄트주에서 콘월주에 이르는 남부 해안을 따라 디바이스 요새로 알려진 일련의 현대적인 해안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이 요새 건설에는 수도원 해체 과정에서 철거된 수도원의 석재가 사용되었다.[256]
상비군 외에 지역별 민병대도 존재했으나, 토머스 울지나 토머스 크롬웰 시기의 정비 시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257][258], 실질적인 정비는 메리 1세 시대에 이루어졌다.[259] 이 민병대는 예비군 형태로 운영되었으나 훈련 수준과 사기가 낮고 지역을 벗어나 활동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헨리 8세는 잉글랜드 왕립 해군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260] 그는 군함에 기존의 작은 세르펜틴(serpentine) 대신 대형 대포를 장착하여 해상 전투 방식을 바꾸었으며,[261] 전함 건조를 위한 조선소를 설립하고 지원 시설을 마련하여 해군을 상설 조직으로 만들었다.[262] 이 시기 해군 전술은 적함에 접근하여 벌이는 백병전 중심에서 원거리 포격전으로 변화했다.[263] 해군력 증강으로 메리로즈호와 같은 대형 군함(500톤 이상)을 포함하여 함선 수가 7척에서 50척까지 늘어났다.[264] 또한 해군 행정을 담당하는 '해양 문제 평의회'(Council for Marine Causes)를 설립했는데, 이는 훗날 해군성의 기초가 되었다.[265]
3. 4. 잉글랜드 종교 개혁

헨리 8세는 일반적으로 잉글랜드 종교 개혁을 시작한 인물로 여겨진다.[69] 잉글랜드를 가톨릭 국가에서 성공회(잉글랜드 국교회) 국가로 변화시킨 이 개혁은 헨리 8세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촉발되었으나, 당시 유럽을 휩쓸던 종교 개혁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1527년까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헨리 8세는[70]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에게 혼인 무효를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캐서린의 조카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쉽게 승인하지 않았다.[71] 교황청의 거절은 헨리 8세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로부터 독립시키려는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혼인 무효 문제가 종교 개혁의 직접적인 '계기'였을 뿐, 그 '원인'은 복합적이었다는 시각도 있다.[72] 일부 역사가들은 헨리 8세가 혼인 무효 문제가 아니었더라도 튜더 왕조의 안정과 왕위 계승 분쟁 방지를 위해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 헨리 8세는 1532년부터 1537년 사이에 일련의 법령을 통해 잉글랜드 교회를 교황청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국왕의 통제하에 두었다.
- 항소 제한 법령 (Statute in Restraint of Appeals, 1533년): 잉글랜드 내의 교회 문제를 로마 교황청에 항소하는 것을 금지하고, 교황의 교서를 잉글랜드로 들여오는 행위를 프라에무니레(Praemunire, 국왕 존엄 침해죄)로 규정하여 처벌할 수 있게 했다.[73] 이는 잉글랜드 교회의 사법적 독립을 선언한 중요한 조치였다.
- 성직자 복종법 (Submission of the Clergy, 1534년): 잉글랜드 성직자들이 국왕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도록 강제했다.
- 교회 임명 법령 (Appointment of Bishops Act 1534): 주교 임명 시 성직자들이 국왕이 지명한 인물을 선출하도록 규정하여, 사실상 주교 임명권을 국왕이 장악하게 했다.
- 수장령 (Act of Supremacy, 1534년): 잉글랜드 국왕을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최고 수장(Supreme Head of the Church of England)"으로 선포했다. 이는 잉글랜드 교회가 교황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음을 법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 반역죄법 (Treasons Act 1534): 국왕의 교회 수장 지위를 인정하는 최고 수장 선서(Oath of Supremacy)를 거부하는 것을 반역죄로 규정하여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 왕위 계승법 (Acts of Succession, 1533년 및 1536년):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하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합법으로 인정하며, 앤 불린의 자녀(처음에는 엘리자베스 1세, 이후 제인 시모어의 아들 에드워드 6세)에게 왕위 계승권을 부여했다. 캐서린의 딸 메리는 사생아로 격하되어 계승 순위에서 밀려났다.[74] 모든 성인은 이 법의 내용을 인정하는 선서를 해야 했다.
- 베드로 성금 법령 (Act concerning Peter's Pence and Dispensations, 1534년): 교황청에 보내던 베드로 성금(Peter's Pence) 납부를 금지하고, 잉글랜드가 "하느님 아래 상급자가 없으며 오직 국왕 폐하만이 계시다"는 점을 재확인하며 교황의 "불합리하고 비인도적인 침범과 착취"를 비판했다.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 헨리 8세는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토머스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여 종교 개혁을 이끌도록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개혁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대법관이었던 토머스 모어와 로체스터 주교 존 피셔는 국왕의 교회 수장 지위를 인정하는 선서를 거부하여 반역죄로 처형되었다.[38] 이들은 훗날 가톨릭 교회에서 순교자로 추대되었다.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은 토머스 크롬웰의 주도하에 더욱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수도원 해산은 종교 개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1535년, 크롬웰은 교회의 재산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교회 재산 평가서''(Valor Ecclesiasticus)를 작성하게 했고, 수도원에 대한 방문 조사를 실시하여 부정적인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이를 근거로 1536년에는 연 수입 200GBP 미만의 소규모 수도원을 해산하는 법령이 통과되었고, 이후 1539년에는 남아있는 모든 수도원을 해산하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1540년까지 잉글랜드 내의 약 800개 수도원이 모두 해산되었고, 그 막대한 토지와 재산은 왕실로 귀속되었다. 이는 왕실 재정을 크게 확충했을 뿐만 아니라(연간 약 90000GBP의 수입[235]), 몰수된 수도원 토지를 귀족과 젠트리 계층에게 불하함으로써 이들을 종교 개혁의 지지 세력으로 만드는 정치적 효과도 가져왔다. 수도원 해산은 잉글랜드 토지 소유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잉글랜드 토지 부의 5분의 1이 이전됨), 가톨릭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조치였다.[238]
그러나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수도원은 당시 빈민 구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에, 수도원 해산은 많은 이들의 생계를 위협했다. 특히 보수적인 가톨릭 신앙이 강했던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1536년 대규모 민중 봉기인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가 발생했다.[251] 로버트 애스크 등이 이끈 이 봉기는 한때 헨리 8세의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거셌으나, 결국 무력으로 진압되었고 주동자들은 처형되었다.[262]
헨리 8세 자신은 신학적으로 완전히 개신교로 돌아선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톨릭 교리를 상당 부분 유지하면서도 교황의 권위만을 부정하는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크롬웰 실각 이후에는 오히려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정책이 강화되기도 했다. 1539년 제정된 6개 조항 법령(Act of Six Articles)은 화체설, 고해성사 등 가톨릭 교리를 재확인하고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도록 규정했다.[43] 이는 헨리 8세의 종교 정책이 일관된 개신교화 과정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틴데일 등의 노력으로 1539년 영어 성경인 대영국 성경(Great Bible)이 출판되는 등 개신교적 요소들이 점차 확산되었다.
결론적으로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은 그의 개인적인 욕망에서 시작되었으나, 당시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국왕 중심의 성공회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잉글랜드의 국가 정체성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동시에 종교적 갈등과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헨리 8세 사후, 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6세 시대에 개신교 개혁이 더욱 진전되었고, 메리 1세 시대에는 가톨릭 복귀 시도가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이르러 성공회가 잉글랜드의 국교로 확립되었다.
3. 5. 웨일스 병합과 아일랜드 국왕 선포
헨리 8세는 1535년과 1542년의 웨일스 법을 통해 웨일스를 잉글랜드의 하위 구역으로 완전히 통합하였다. 웨일스는 13세기 이후 이미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잉글랜드 국왕의 적장자에게는 관례적으로 웨일스공 작위를 주어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였으나, 이때까지는 독자적인 영토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 합병 이후 웨일스는 잉글랜드의 일부로 여겨지다가 1999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독자적인 의회를 구성하였다.
아일랜드의 경우, 노르망디가 이후 지속적인 잉글랜드의 침공으로 점차 분할되었다. 15세기 무렵에는 잉글랜드에 비교적 순종적인 렌스터와 먼스터, 그리고 명목상으로만 충성하며 게일어를 사용하는 영주들이 지배하는 코노트와 얼스터로 나뉘어 있었다.[266] 헨리 7세 시기까지 잉글랜드 국왕은 아일랜드에서 렌스터와 먼스터의 영주일 뿐이었다. 헨리 8세는 재위 초기 아버지의 정책을 따랐으나, 아일랜드 영주들 간의 불화를 이용하여 잉글랜드의 지배권 강화를 시도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에게 아일랜드는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받은 봉토였으나, 1542년 헨리 8세는 로마와의 결별 이후 스스로 아일랜드 국왕을 자처했다. 그는 분열된 켈트족 영주들의 상황을 이용해, 영주들의 영지를 일단 국왕에게 귀속시킨 뒤 충성 서약을 받고 다시 봉토로 하사하여 아일랜드 의회 상원에 출석하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했다.[267] 그러나 이 계획은 전통적인 켈트 부족 간 회의 체제와 맞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고, 1543년 헨리 8세는 봉토 재분배 계획을 철회하였다.[268]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자동적으로 아일랜드 국왕을 겸하는 것으로 선포되었지만, 실제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는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 시기까지 정복 전쟁이 이어졌다.[269]
3. 6.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관계
16세기 유럽은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중심으로 복잡한 국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을 앞세운 합스부르크가는 저지대 국가의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대립하는 한편, 베네치아 공화국과 대립할 때는 프랑스와 일시적인 동맹을 맺기도 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동맹 관계가 수시로 바뀌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왕족 간의 결혼은 이러한 동맹을 상징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헨리 8세가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결심한 것도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스페인과의 동맹 유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103][104][105]
헨리 8세가 즉위했을 당시, 유럽 대륙에서는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가 연합한 캉브레 동맹 전쟁이 베네치아 공화국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510년, 베네치아 공략을 위해 프랑스가 합스부르크와 동맹을 맺자, 헨리 8세는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도[271] 동시에 장인인 스페인의 페란도 2세와 프랑스에 대항하는 조약을 맺는 이중적인 외교를 펼쳤다. 헨리 8세에게 프랑스와의 유화적 접근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1511년 10월, 교황 율리오 2세가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 스페인 등과 함께 캉브레 신성 동맹을 결성하자, 헨리 8세는 즉시 이에 가담하여 스페인과 동맹을 맺었다.[272] 헨리 8세는 이 전쟁을 통해 백년 전쟁 이후 잃었던 프랑스 내 영지인 아키텐을 되찾아 자신의 야망을 실현할 발판으로 삼고자 했다.[273] 그러나 1512년 전쟁이 시작된 후, 페란도 2세가 동맹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 하면서 잉글랜드와 스페인 사이에 긴장감이 형성되기도 했다.[274] 그럼에도 프랑스를 꺾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갈등은 봉합되었고, 교황청과 베네치아가 프랑스를 이탈리아 북부에서 몰아내며 동맹은 승기를 잡았다.[275][276] 헨리 8세는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를 설득하여 프랑스와의 동맹을 깨고 신성 동맹에 가입시켜 외교적으로 프랑스를 압박했다.[277] 교황 율리오 2세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헨리 8세에게 "프랑스의 가장 기독교적인 왕"이라는 칭호를 약속하며, 루이 12세를 꺾으면 파리에서 직접 프랑스 왕관을 수여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278]
1513년 6월 30일, 헨리 8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침공하여 스퍼스 전투에서 승리했다. 전투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잉글랜드는 이 승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헨리 8세는 테르완을 점령하여 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겨주었고, 이어서 투르네도 점령했다.[279] 헨리 8세가 프랑스 원정에 나서자[280] 프랑스와 동맹 관계였던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281] 국왕이 부재한 상황이었지만, 왕비 카탈리나가 지휘한 잉글랜드군은 1513년 9월 9일 플로든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고 제임스 4세를 전사시켰다.[282][283] 스코틀랜드는 전쟁을 포기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헨리 8세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 비용 부담이 커지면서 잉글랜드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특히 동맹국인 페란도 2세와 막시밀리안 1세 측의 전쟁 비용까지 잉글랜드가 부담하는 상황이었다.[284] 때마침 교황 율리오 2세가 사망하고 프랑스에 우호적인 교황 레오 10세가 즉위하여 화친을 제의하자, 헨리 8세는 1514년 루이 12세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같은 해 10월 9일,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가 52세의 루이 12세와 결혼했다.[285] 그러나 루이 12세는 결혼 3개월 만에 사망했고, 메리는 잉글랜드로 돌아와 헨리 8세의 친구인 찰스 브랜던과 재혼했다. 프랑스 왕위는 프랑수아 1세가 계승했다.[286]
한편, 합스부르크 가에서는 카를 5세가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그는 1516년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했고, 1519년에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뒤를 이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주요 강대국들의 군주가 모두 젊은 세대로 교체되면서 유럽의 국제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중재로 1518년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잉글랜드, 프랑스, 합스부르크 제국 등이 참여하는 상호 불가침 조약인 런던 조약이 체결되었다.[287] 1520년, 헨리 8세는 프랑스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프랑스 영토인 칼레 근처에서 프랑수아 1세와 만나 화려한 연회와 마상 시합 등을 벌였다. 이 회동은 금란의 들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288] 헨리 8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프랑수아 1세 역시 당시까지 잉글랜드 영토였던 칼레를 되찾으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헨리 8세는 재정적 여력이 부족했고, 프랑수아 1세는 당면 과제인 합스부르크와의 대립 때문에 잉글랜드와의 갈등을 피해야 했기에, 금란의 들판 회동은 일시적인 친선 행사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289]
결국 1521년 런던 조약은 파기되었고, 프랑스는 이탈리아 전쟁을 재개했다. 헨리 8세는 처음에는 중재를 시도했으나, 이후 카를 5세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 북부를 공격하며 영토 회복을 시도했다.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에게 포로로 잡히자 프랑스는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그해 8월, 헨리 8세는 프랑스와 모어 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발을 뺐다. 프랑수아 1세는 포로 상태에서 1526년 마드리드 조약을 통해 부르고뉴를 포기해야 했다.[290] 헨리 8세는 약 8년간의 전쟁을 통해 군사적 위엄을 과시하려는 야망을 어느 정도 실현했지만, 잉글랜드가 얻은 실질적인 이익은 미미했다.
1539년,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자 헨리 8세는 새로운 기회를 포착했다. 카탈리나와 앤 불린이 모두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카를 5세는 과거의 일을 덮고 헨리 8세와 비밀 동맹을 맺었다. 헨리 8세는 다시 한번 프랑스를 침공하여 오랜 야망을 실현하고자 했다.[207] 프랑스 침공에 앞서 배후의 위협인 스코틀랜드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1542년 11월 24일, 잉글랜드군은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고,[208] 이 전투의 여파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는 12월 15일 사망했다. 왕위는 태어난 지 일주일 된 메리에게 돌아갔다. 헨리 8세는 자신의 아들 에드워드 6세와 메리를 결혼시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통합하려 했다. 스코틀랜드 섭정 애런 백작은 1543년 7월 그리니치 조약을 통해 결혼에 동의했지만, 같은 해 12월 스코틀랜드 의회가 이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척박한 구애(Rough Wooing)"라 불리는 8년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스코틀랜드는 헨리 8세가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의 잦은 침공에 시달렸다.[209][210][211][48][49]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길어지자 헨리 8세는 프랑스 침공을 주저했고, 카를 5세는 계속해서 참전을 재촉했다. 마침내 1544년 6월, 잉글랜드와 신성 로마 제국 연합군은 두 갈래로 프랑스를 침공했다. 노퍽 공작이 이끄는 부대는 몽트뢰유를 비효율적으로 포위했고, 서퍽 공작이 이끄는 다른 부대는 불로뉴를 포위했다. 헨리 8세가 직접 지휘에 나서 1544년 9월 18일 불로뉴를 함락시켰다.[212][213][48] 그러나 헨리 8세는 파리를 공격하라는 카를 5세의 요청을 거절했다. 카를 5세의 단독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같은 날 프랑스와 단독으로 강화 조약을 맺었다.[214][49] 홀로 프랑스를 상대하게 된 헨리 8세는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 1546년 6월 7일, 헨리 8세는 프랑스와 아르드르 조약(캄프 조약)을 맺었다. 잉글랜드는 8년 동안 불로뉴를 점령하고, 이후 75만파운드을 받고 프랑스에 반환하기로 했다. 1544년 원정에만 65만파운드 이상의 비용을 사용하여 잉글랜드는 다시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215][49]
4. 평가와 비판
헨리 8세는 그의 복잡하고 방대한 유산으로 인해 "수세기 동안 칭송받고 비난받았지만, 결코 무시된 적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80] 그는 치세 동안 보여준 복잡한 성격으로 여러 세기에 걸쳐 다양한 평가를 받아왔지만, 근세 잉글랜드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291]
1950년대 역사가 존 D. 매키는 헨리 8세의 성격과 업적, 그리고 대중적 인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가 백성으로부터 받았던 존경심, 아니 인기조차도 과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영국의 발전을 당시 가장 활기찬, 비록 고귀하지는 않은 세력들과 일치시켰다. 그의 높은 용기 – 일이 잘못되었을 때 가장 높았다 – 그의 지휘적인 지성, 사실에 대한 그의 이해, 그리고 통치에 대한 그의 본능은 그의 나라를 위험한 변화의 시기를 헤쳐 나가게 했고, 그의 오만함조차도 다른 나라를 괴롭혔던 전쟁으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했다. 장미 전쟁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유럽의 학살과 고통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던 영국의 백성은 헨리에게 위대한 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79]
헨리 8세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역사가 A. F. 폴라드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그는 헨리 8세를 "개인적인 결점이 무엇이든 간에 영국을 의회 민주주의와 제국의 길로 이끈 왕이자 정치가"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80] 이러한 해석은 헨리 8세가 가문의 유지, 외교 동맹, 정복욕 등 복잡한 이유로 파혼과 재혼을 반복하는 개인적 실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의 부흥을 이끌었다는 점을 강조했다.[292]
그러나 1953년 제프리 엘턴은 토머스 크롬웰의 역할을 부각하며 헨리 8세를 새롭게 해석했다. 엘턴은 헨리 8세가 종교 개혁이나 외교 문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 없이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기중심적 괴물"이었으며, 크롬웰의 개혁을 따른 것은 단지 자신의 개인적 욕구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293][294] 엘턴에 따르면, 헨리 8세는 지도자라기보다는 추종자였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의 성공은 주변 인물들의 덕분이며, 실패와 공포는 주로 왕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
엘턴의 제자인 J. J. 스캐리스브릭은 크롬웰의 역할에 대한 스승의 견해를 지지하면서도, 헨리 8세가 단순히 개인적 이익에만 관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교와 전쟁 등에서 자신만의 야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정책을 지시하고 형성했다고 주장했다.[295][80] 스캐리스브릭은 헨리 8세를 모순적이면서도 강렬하고 매력적인 르네상스적 인물로 묘사했지만[296], 그의 통치 시대를 격변과 파괴의 시대로 보며 책임자인 헨리 8세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80]
헨리 8세의 성격 변화에 주목하는 견해도 있다. 데이비드 스타키 등은 헨리 8세의 통치를 두 시기로 나누어, 초기에는 경건하고 관용적이며 지적인 면모를 보였으나[64], 후기에는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인 "거대한 폭군"으로 변모했다고 본다.[297][298] 한편, 레이시 볼드윈 스미스는 헨리 8세가 특별한 재능보다는 급하고 의심 많은 성격에 평범한 지능을 가졌으며, 경계성 신경증을 앓았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그의 행동이 주로 이기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했다.[299]
이처럼 헨리 8세가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일어난 변화들에 얼마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기회주의의 결과인지 원칙에 따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이며, 데이비드 로즈, 데이비드 스타키, 그리고 존 가이를 포함한 많은 전기 작가들 사이에서도 합의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80] 헨리 8세는 종교적 보수주의자 또는 급진주의자, 예술 애호가 또는 파괴자, 충실한 친구 또는 배신자, 기사도 정신의 화신 또는 무자비한 쇼비니스트 등 다양한 모습으로 해석되고 있다.[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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